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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진의 전개 1920-1970년대

김영태

한국사진의 전개 1920-1970년대


글: 김영태 사진비평 현대사진포럼대표


1) 일제강점기의 예술사진(1920-1940) 


우리나라에서 사진을 표현매체로 사용하는 작가들이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후반이다. 이 시기에는 일본사진의 영향을 받아서 당시 일본에서 유행한 예술사진의 경향을 그대로 수용했다. 또 서양의 초기 예술 사진가들과 마찬가지로 예술사진은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주도했다. 이들은 공모전 출품을 통해서 활동했고 주된 표현대상은 아름다운 자연풍경이나 민속적인 풍물 이였다. 그런데 공모전 출품이 아닌 개인전을 통해서 자신들의 미적인 감각과 주관을 드러낸 이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정해창, 서순삼, 현일영 등이다. 이들 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초기 한국사진문화를 개척한 선구자로서 박필호가 있다.


정해창은 한국여성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특유의 섬세한 시각과 감수성으로 표현했다. 정형화된 공모전 형식이 아닌 개인전을 통하여 자신의 작품세계를 펼쳐 보였다. 서순삼은 사진기자로 출발하여 개인전을 통해서 시대를 반영하는 작품을 발표했다. 다큐멘터리적인 요소가 느껴지는 사진작업을 했다. 현일영은 한국초기 사진사에서 가장 차별화된 조형언어를 개척한 사진가다. 


탐미주의적인 풍경이나 풍물사진이 주된 경향이었던 시절에 형식주의적인 정물사진을 통해서 형식 그 자체가 미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그는 사과. 재떨이, 한복, 버선 등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상을 선택하여 사진의 기계적인 재현능력을 바탕으로 형식미를 탐구했다. 박필호는 초상사진가로 출발해 사진교육자, 사진평론가 등 다양한 분야를 개척하면서 한국사진의 초창기를 개척했다. 작가는 정물과 초상사진을 통하여 스트레이트포토의 묘미를 보여주었다. 


이들의 작품은 서양사진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인상주의 회화의 영향을 받은 피터 헨리 에머슨 Peter Henry Emerson의 자연주의 사진 Naturalistic Photography이나 알버트 렝거파취Albert Renger Patzsch의 신객관주의 사진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지금까지 언급한 이들 외에도 예술사진과 기록사진을 접목하여 초기 한국예술사진을 주도한 이가 대한국제국황실의 후손인 이해선이다. 그는 당시의 전형적인 사진형식인 탐미주의적인 살롱사진을 추구했다. 또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가옥을 비롯한 문화재를 기록으로 남겼다.


1930년대 한국사진은 일본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고, 사진문화도 일본인들이 주도했다. 또 언론사나 사진단체가 주관하는 공모전에 출품하는 것이 작가로서의 주된 활동모습 이였다. 19세기 후반 서양사진가들의 활동과 거의 대동소이했다. 그들 중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여 주목받은 이가 회령의 정도선과 대구의 최계복 이다.   정도선은 1945년 해방 전까지 회령에서 활동하면서 그곳의 문화와 정서를 반영하는 사진을 찍었는데 공모전 형식을 빌렸지만 개성적인 조형언어를 구축했다. 


 최계복은 대구의 사진문화를 주도했다. 공모전을 출품을 통해서 작가로서의 명성을 쌓았는데, 사진가 단체를 조직하여 예술사진의 전통을 이어갔다. 또 해방 후에는 대구예술사진학원을 설립하여 후학들을 배출하였다. 그는 서울로 진출하여 사진학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1세대 사진가로서 대구사진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가 조직한 사진단체 출신들이 대구사진의 지도자로 자리매김하여 초기 대구사진문화를 이끌어 갔다. 이 대목에서 미국의 예술 운동가이자 사진가인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들보다 연배가 어리지만 부산의 임응식은 일찍이 예술사진을 접하면서 독자적인 사진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일찍이 음악, 미술 등 예능교육을 받기도 했다. 또 작가는 본격적으로 사진작업을 하기 위해서 군사보호 구역인 부산보다 사진촬영에 대한 제약이 덜한 강릉으로 거주지로 옮기기도 했다. 그는 강릉에서 이형록을 만나서 강릉사우회를 조직하여 지도자로서의 면모도 보여준다. 그가 추구한 사진은 당시의 주된 경향인 탐미주의적인 살롱사진이다. 


이처럼 초기 예술사진은 일본사진의 경향을 그대로 수용하여 탐미적인 내용과 정형화된 공모전사진이 주류를 이루었다. 빛의 조화가 만들어낸 아름다움이나 비 은염 인화가 주된 표현방식이었다. 20세기 초반까지의 서양사진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정부분 우리나라 고유의 정서와 문화가 결합되어 고유한 결과물이 생산되기도 했지만, 전체적인 풍경은 초기 서양예술사진의 미학을 수용한 결과로 판단된다.


1945년에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벗어났지만 한국사진의 풍경은 뚜렷하게 달라 진점이 없었다. 하지만 탐미주의적인 시선이 아닌 현실을 기록함으로써 외부세계에 대한 자신의 사회적인 시각을 드러낸 이도 있었다. 그가 미군정하에서 발생한 식량배급문제와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을 기록한 임석제이다. 사회주의사상을 가진 사진가들의 단체에서 활동한 그는 다큐멘터리라는 용어가 일반화되기 훨씬 전에 현실과 유리된 유미주의적인 사진이 아닌 현실을 직시한 사진 찍기를 함으로써 초기 한국사진사를 풍요롭게 하는데 기여했다. 


해방 정국의 한국사진은 이념적으로 대립된 한국사회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마찬가지로 일부 사진가들은 편향된 이념을 바탕으로 정치적인 수단으로 사진을 이용하기도 했다. 임석제가 기록한 사회적인 사진에서도 그러한 시각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당시의 주된 사진경향과는 차별화된 태도로 사진작업을 한 점은 주목 할 만 한 점이다. 1940년대 한국사진은 일제 말기의 강압적인 사회분위기와 해방정국하의 혼란스러운 사회분위기를 거치면서 새로운 변화의 시대로 향하고 있었다.



2) 생활주의 사진과 한국사진문화의 형성(1950-1970)


해방이후 한국사진은 일제강점기의 사진미학과 별다른 차이점이 없었다. 일부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사진가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사진가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탐미주의적인 살롱사진에 몰두했다. 또 사회전체가 이념적으로 좌우로 나누어져서 극한 대립을 한 것 과 마찬가지로 예술계도 좌익과 우익으로 대립되었다. 그 후 미군정이 자리를 잡으면서 공산당이 불법화되자 사회주의사상을 가진 예술가들은 월북하거나 잠적하였다. 그것은 사진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사회주의 이념을 갖고 있던 사진가들의 단체는 해산되었고, 주요 구성원들은 월북하였다. 그런데 해방이후의 혼란스러운 현실을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기록한 사진가 있는데 그가 바로 고향에서 해방을 맞은 이경모이다. 그는 해방의 감격을 만끽하는 군중들의 모습과 지역의 지도자들이 해방정국의 상황을 논의하는 회의 장면 등 해방정국의 여러 현실을 기록했다.


한국사진은 1950년부터 3년 동안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새로운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당시에 활동한 많은 사진가들이 종군기자나 군속으로 사진을 담당하며 한국전쟁을 체험하게 된다. 대표적인 사진가가 임응식, 임인식, 성두경, 이경모 등이다.


이들은 서양의 포토저널리스트들이 찍은 한국전쟁사진처럼 최전선에서 치열한 전투장면을 찍지는 못했다. 하지만 마가렛트 버크화이트Margaret Bourke-White나 데이비드 더글러스 던컨 David Douglas Duncan 등과 같은 유명 포토저널리스트들이 현실을 대면하는 태도에 영향을 받는다. 한국사진가가 찍은 한국전쟁사진 중에서 다른 사진가들과 차별점이 느껴지는 작품이 있다면, 성두경이 서울풍경을 찍은 사진이다. 그는 서양사진가들처럼 리얼한 전투사진을 찍지는 못했지만, 인천상륙작전이후 수북한 서울의 풍경을 찍었다. 그는 폐허가 된 서울의 이곳저곳을 카메라 렌즈에 담았다. 절제된 조형감각이 느껴지는 사진들이다. 프랑스 파리를 찍은 유젠느 앗제의 사진처럼 사람은 배제되고 파괴된 건물과 가옥이 담겨져 있는 사진을 찍었다. 처참한 전쟁의 흔적들이지만 역설적으로 조형미가 느껴진다.


한국전쟁이후 한국사진은 새로운 변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같은 민족끼리 총구를 겨눈 아픔을 겪으면서 사회현실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한국전쟁을 취재하기위해서 종군한 서양의 포토저널리스트들의 사진을 찍는 태도와 1955년에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사진가이자 전시기획자인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기획한 ‘인간가족展’은 당시 한국의 사진가들에게는 신선한 자극으로 받아들여졌다. 또 일본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사진도 한국사진가들에게는 새로운 사진경향으로 인식되었다.


이와 같은 외부의 영향으로 인하여 서울에서는 임응식, 이명동 그리고 대구에서는 구왕삼이 리얼리즘사진에 대한 자신들의 신념을 설파하게 된다. 임응식, 이명동은 뜻을 합쳐서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생활주의 사진’이라는 리얼리즘사진운동을 펼친다. 특히 동아일보에서 주최한 동아사진콘테스트는 새롭게 입문하는 젊은 사진가들에게 리얼리즘사진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효과적인 역할을 했다. 이 사진콘테스트에 입상함으로써 사진계에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된 이들이 육명심, 홍순태, 한정식 등과 같은 현재의 원로사진가들이다.


이중에서 육명심은 본격적인 사진작업을 하면서 ‘백민’, ‘장승’ 시리즈를 통하여 한국의 정신문화를 재발견하려고 했다. 그는 당시의 다른 사진가들 보다는 빠르게 서양의 사진경향과 사진사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독학을 했다. 특히 1970년대부터 대학에서 사진이론 강의를 하면서 ‘세계사진가론’이라는 이론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세계사진사를 자신의 방식으로 재해석해서 수용했다. 홍순태도 서양의 사진경향을 빠르게 파악했던 사진가 중에 한 사람이다.


그는 로버트 프랭크의 ‘미국인’에 큰 영향을 받았는데 실제로 버스를 타고 미국을 여행하면서 미국의 이곳저곳을 찍기도 했다. 또 작가는 오랫동안 이 땅의 민중들을 찍기도 했는데 리차드 아베든, 다이안 아바스 등과 같은 미국의 사진가들이 찍은 인물사진과 유사한 표현방식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는 서양현대사진의 경향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로버트 프랭크, 게리위노그랜드, 리 프리들랜더 등과 같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작품에서부터 1970년대 뉴 토포그래픽스 사진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주요 사진경향을 수용하여 국내 사진계에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사진가로서보다는 사진교육자로서의 역할이 더 돋보이는 작가다. 작가는 사진가, 교육자뿐만 아니라 이론가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론서인 현대사진의 조류, 현대사진의 전개와 비평 등 다수의 사진이론서를 출판하여 사진전공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한정식도 사진가이자 사진교육자이다. 또한 이론가로서의 역할도 했다. 그는 나무, 여성, 풍경, 발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다. 육명심, 홍순태 등이 다큐멘터리적인 사진작업을 했다면, 한정식은 미국의 형식주의사진을 연상시키는 조형적인 사진작업을 주로 했다. 절제된 조형언어를 통하여 스트레이트포토의 매력을 보여준 사진가다. 작가도 일찍이 서양의 현대사진경향을 접하고 대학 강단에서 서양사진사와 이론을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또 사진예술개론을 비롯한 이론서를 저술하여 사진이론을 정립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육명심, 홍순태, 한정식 등 세 사진가는 사진을 시작하는 과정도 비슷하고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사진전공자들 뿐만 아니라 아마추어 사진가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사진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또한 현재도 일정부문 이들의 족적들이 남아있고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들은 아마추어 사진가로서 공모전을 통하여 사진에 입문하였다는 한계점이 있다. 하지만 서양의 사진사, 사진미학, 현대사진론 등 사진이론을 독학으로 공부하여 이론적으로 무장한 첫 세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이해는 하였지만 체화된 지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1990년대 초반부터는 새로운 사진경향에 보수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임응식의 생활주의 사진운동은 동아사진콘테스틀 통하여 아마추어사진가들과 신진 작가들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또 임응식 보다 조금 어린 세대인 이형록은  ‘신선회’라는 사진단체를 조직하여 리얼리즘사진을 실천적으로 보여준다. 


이후 신선회는 ‘싸롱 아루스’라는 단체로 개명을 하면서 리얼리티와 조형성이 가미된 사진을 보여준다. 이 단체의 리더인 이형록은 조형성과 리얼리티가 유효적절하게 섞어져 있는 사진언어를 보여준다. ‘싸롱 아루스’는 당시의 20대 사진입문자를 교육하기 위하여 ‘현대사진연구회’라는 사진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이때가 1960년이다. 이 모임에는 전몽각, 정범태, 황규태, 박영숙 등과 같은 원로사진가들이 가입하여 활동했다. 그뿐만 아니라 조천용 등 일간신문의 데스크를 담당했던 사진기자들이 현대사진연구회를 거쳤다. 또 주명덕, 강운구 등도 이 시기에 사진작업을 시작했다. 전몽각은 토목공학을 전공했고 성균관대학교 토목공학과 공학과 교수로서 정년퇴임했다. 20대부터 평생 아마추어사진가로서 소박하게 사진작업을 했던 작가이다.


하지만 딸이 태어날 때부터 결혼할 때까지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기록한 ‘윤미네 집’시리즈는 한국사진에서 귀중한 결과물이다. 수많은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유미주의적인 사진작업을 하거나 걸작주의적인 사진작업에 몰두하고 있을 때 소박한 시선으로 딸의 성장과정을 찍었다는 것은 사진에 대한 작가만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경제개발과 더불어서 고도 성장기였던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까지의 우리나라 중산층의 삶과 문화가 담겨져 있다. ‘윤미네 집’은 1990년에 작품집으로 정리되어 발표된 이후 20년만인 2010년에 다시 출판되어 주목받았다.


1960년대에 자신과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사건에 관심을 갖고 사진을 찍었다는 것은 사진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일이다. 정범태는 리얼리즘을 추구한 사진모임인 ‘신선회’에서 사진을 시작했다. 그 후 1966년부터 50여 년 동안 사진기자로서 격동기의 한국사회를 기록했다. 여러 정치, 사회적인 변혁기를 기록한 사진가이다. 저널리즘적인 내용이지만 한국사회가 독재정권, 권위주의정권, 민주화 과정 등을 거치면서 얼마나 많은 사회적인 변동을 겪었는지 충실히 보여준다.


황규태는 경향신문 기자로서 활동하면서 1960년대 한국사회의 여러 현실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의 다른 사진가들과는 다르게 정형화되지 않은 앵글과 프레임을 선택해서 차별화된 결과물을 보여주었다. 이후 미국으로 이민 가서 사업을 하면서 사진작업을 지속적으로 했는데, 이때부터 실험적이면서도 아방가르드적인 작품을 현재까지 보여주고 있다. 현대사회의 문화적인 현실을 반영하는 풍자적인 작업을 하는 가하면 미국의 팝아트를 연상시키는 작품도 발표해서 주목받고 있다. 박영숙은 숙명여대 사진반 ‘숙미회’를 조직하기도 했는데 여성주의적인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다. 2006년도부터는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사진작품시장을 개척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새로운 사진경향인 생활주의사진이나 서양의 포토저널리즘 혹은 다큐멘터리사진의 영향을 본격적으로 받은 주명덕과 강운구는 작품의 주제나 표현형식이 다르면서도 한국적인 정서 및 고유한 문화를 보여주려고 했다는 점에서 닮은 점이 있다. 그중에서 주명덕은 20대 초반에 홀트씨 고아원 ‘섞여진 이름들’이라는 주제로 한국전쟁의 산물인 혼혈아를 다룬 다큐멘터리적인 작품을 발표해서 1세대 다큐멘터리사진가로 평가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 이전 세대인 임석제, 이경모, 김한용, 성두경, 임응식 등이 사회적인 현실을 기록한 사진작업을 했기 때문에 좀 더 진중하게 논의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작가가 1950년대에 출생한 다음세대의 사진가들에게 끼친 영향력은 한국사진사에서 주목해야 할 점이다.  강운구는 주명덕과 마찬가지로 포토저널리스트로 출발한 사진가다. 사진의 본질이라고 생각한 기계적인 기록성에 충실한 사진 찍기를 하는 사진가다. 작가는 1970년대 한국농촌 현실을 사실주적이면서도 상징적인 코드를 선택해서 기록했다.


미국 다큐멘터리 사진가 워커 에반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기술적인 측면보다는 인문학적인 지식을 중요하게 여긴다. 탐미주의적인 태도가 아닌 사회적인 현실에 대한 사진가의 발언을 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초기 한국사진가들의 미학적인 태도와 확연한 차별점이 발생한다. 작가는 사회적인 현실도 기록했지만 경주 남산에 흩어져 있는 불상을 조형적으로 기록하여 주목받기도 했다. 또 1980년대에는 미술세계에 세계사진의 새로운 흐름을 소개하는 글을 연재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전문적인 과정을 거친 이론가나 평론가가 일본에서 사진이론을 전공하고 귀국한 김승곤 외에는 전무했기 때문에 작가인 강운구가 미술잡지에 기고한 이 연재물은 당시에 이론을 목말라 했던 사진전공자들을 비롯한 젊은 사진가들에게 소중한 학습 자료였다. 


1970년대 한국사진은 전반적으로 다큐멘터리사진이 강세였다. 하지만 유신독재정권이 철권통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현실에 대한 사진가로서의 주관을 표현하기보다는 상징적인 어법을 구사했다. 또 서양사진사를 독학해서 좀 더 체계적으로 학습하고 연구하는 이들이 등장하여 작품에 반영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초기 예술 사진가들이 추구한 탐미주의적인 살롱사진에서 벗어난 사진작업을 하는 사진가들이 점차적으로 늘어났다.


1955년도에 출생한 대구출신 사진가 권부문은 1975년에 서울과 대구에서 ‘포토 포엠’시리즈를 발표해서 큰 주목을 받았다. 강한 콘트라스트가 인상적인 흑백사진인데 윌리엄 클라인의 ‘뉴욕’시리즈나 ‘동경’시리즈가 연상되는 작품이다. 이 사진가의 영향으로 대구에서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개인전을 통하여 독특한 작품들이 연이어서 발표된다. 1977년에는 김종수의 ‘토지’시리즈, 1978년에는 차용부의 ‘빙점에서 만난 아이들’시리즈, 1979년에는 양성철의 ‘잔상’시리즈, 1980년에는 김정수가 다큐멘터리적인 작품인 ‘선감리’ 시리즈를 발표해서 개인전 붐을 유발했다. 이들은 대부분 1980년대 초반 혹은 1990년대 초반부터 대학 강단에서 교수로서 강의를 하면서 1960년대 초반이후에 출생한  사진전공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한국사진은 출발점부터 예술사진은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주도하였고, 학문적인 태도가 아닌 취미적인 관점에서 사진이 다루어졌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작가적인 태도로 사진을 다루는 사진가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70년대부터는 좀 더 본격적으로 아마추어 사진가들과의 차별점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한국사진작가협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아마추어 사진가들은 여전히 공모전 사진에 몰두하였다. 그에 반해서 전문적인 사진가들은 사진기자로 활동하거나 광고사진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 서양에서 출간된 이론서적 이나 잡지를 구해서 독학으로 사진사를 비롯한 사진이론을 공부하여 전문가로서의 기본적인 자질을 갖추어 나갔다.


그 결과 사진작업을 하는 미학적인 태도와 작업의 결과물에서 차별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또 사진학과는 수적으로 미미하였지만 대학에 사진동아리가 조금씩 늘어나면서 학문적인 입장에서 사진을 연구하여 새로운 사진문화를 주도했다. 비록 취미로서 사진을 선택했지만 진지하게 사진을 다루었고, 졸업 후에는 신문사에 사진기지로 취업하거나 본격적으로 사진을 전공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변화가 토대가 되어 1980년대 초반부터 한국사진은 새로운 변화의 징후가 보였고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현대화, 국제화, 세계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서양사진도 변화의 시기에 있었는데, 신디 셔먼, 바바라 크루거, 세리 레빈 등 여성 미술작가들이 모더니즘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수단으로 사진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활동이 1980년대에 미술잡지를 통하여 국내에 소개되었고 그 영향을 받은 것 같은 작품이 1990년대 초반부터 일반화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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